출장용접 [속보]“고 이재석 경사 순직에 책임”…김용진 해양경찰청장 전격 사의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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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중 작성일25-09-18 09:00 조회1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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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용접 김용진 해양경찰청장이 15일 고 이재석 경사 순직 논란과 관련해 사의를 표명했다.
김 청장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순직 해경 사건 관련 대통령님의 말씀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이 사건의 진실규명과 새로운 해양경찰에 도움이 되고자 사의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김 카마그라구입 청장의 사의 표명은 이재명 대통령이 이날 이 경사의 사고 경위 등에 대해 해경이 아닌 외부의 독립적인 기관에 맡겨 엄정히 조사하라고 지시한 뒤 단 몇 시간만에 이뤄졌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스스로를 ‘막차 탄 세대’라 불렀다. 학생운동이 최절정에 달하고 점차 퇴조하던 시대의 분위기를 자조하는 말이었다. 작년 12·3 계엄 포고문에서 대학이 언급되지 않은 건 그 장기적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30년이 지나도 ‘막차’는 끊기지 않았다. 비주류일지라도 학생운동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대학생 대신 다른 이름을 지닌 다양한 운동이 성장해왔다. 겨울의 광장을 가득 메운 깃발과 응원봉은 그 결과다.
그렇다면 ‘막차’라는 은유야말로 민주화 시기의 학생운동을 과도하게 신화화한 것 아닐까. ‘막차 탄 세대’는 오히려 민주화 이후 새로운 시대의 ‘첫차’를 탔던 것 아닐까. 그 누구도 자기 시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들 자신의 시대를 살고, 시대와 대결하는 것을 통해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막차는 시대에 둔감해져 그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첫차는 다른 누군가의 막차가 된다.
조국혁신당 성폭력 사건과 당의 대응을 지켜보면서, 모두가 동일한 밀도로 동시대를 통과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언론에 출연한 인사들은 2차 가해와 직장 내 괴롭힘이 일어나는 조직문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절차를 지켰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들은 해일 앞에 웅크린 채 조개만 줍고 있다.
조국혁신당을 향한 여론이 보여주듯, 한국 사회는 그런 안일한 대응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데까지 왔다. 이제는 10년이 되어가는 페미니즘 리부트, 권력형 성폭력을 향한 미투 운동,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 지켜낸 지난겨울의 광장에 이르기까지. 누군가는 그 밀도 높은 시간을 치열하고 절박하게 통과해왔다. 이번 시대의 ‘첫차’는 그들의 몫이다. 반대로 그 시대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혹은 피해자 비난과 조직 보위 논리라는 잘못된 교훈을 도출한 이들도 있다. 이제 그들에게는 ‘막차’ 타고 귀가해야 할 의무가 남았다.
첫차와 막차 사이에 기억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조국혁신당의 무책임한 대응은 지난 10년간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이다. 망각한 자는 성폭력 사건을 그저 털어낼 리스크로 볼 뿐이다. 하지만 시대로부터 배우며 공동의 기억을 새겨온 사람들은 피해자 곁에 서며 저항했다.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 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막차 전 탈출을 시도하는 조직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청년과 중년의 경계에 선 나도 책임을 느낀다. 더 이상 위를 향해 들이받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게 됐다. 안타깝게도 좋은 어른은 드물고, 특히 좋은 남자 어른은 멸종위기종이다. 대신 반면교사는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을 닮지 않으려면, 미숙하고 모자라지만 나도 이제 어른 행세를 해야 한다. 기자회견에 나선 강미정 전 대변인의 모습이 그러했다. 후배와 부하의 실수를 책임지는 건 나다. 그들이 부당한 일을 겪으면 내가 들이받아야 한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크기를 가늠하고, 내 위치를 의식하며 후배를 대하려 한다. 믿고 맡기는 동시에 지켜봐주고, 먼저 마음을 읽어주고 알아주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 되뇐다. 나는 이것을 운 좋게 만난 어른인 노혜경 시인에게서 배웠다.
지난 12·3 내란은 지지 기반이 줄어들고 고립돼가는 장기적 위기를 뒤집으려던 보수 세력의 쿠데타였다. 아직도 내란 세력이 국가 시스템 곳곳에 자리하고, 극우 세력의 준동은 위협적이다. 다만 그것이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과 명분으로 삼는 걸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런 시시하고 못난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시대로부터 배우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 그것이 용기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향한 응답 책임을 잊지 않으려는, 지난 10년 동안 성장해온 내 나름의 기억투쟁이다.
미국 극우 활동가 찰리 커크 피살 후 극우들의 ‘국제 연대’가 표면화하고 있다. 유럽 곳곳에서 추모 행사가 열리고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같은 극우 정치인은 신앙과 자유의 진정한 수호자라고 했다. 폴리티코는 지난 13일(현지시간) 이런 현상을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국제적 수렴이라고 했다. 커크는 피살 닷새 전인 5~6일 ‘빌드업 코리아 2025’에 초청돼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영국 BBC가 영국 현대사 최대 규모 극우 반이민 시위라 한 13일 런던의 ‘왕국 통합 집회’에서도 눈길을 끈 것은 극우 ‘국제 연대’였다. 집회에 가세한 영국·독일·덴마크 극우 정치인들은 여러분의 싸움이 곧 우리의 싸움이라고 했다.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에서 보았듯 한국 극우 집회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건 성조기다. 12·3 내란을 옹호하는 한국의 극우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은 특히 미국 극우와 연대를 도모하며 미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전한길)을 학수고대한다.
극우 세력이 전 세계인 일상에 이처럼 가까이 다가온 건 1930년대 ‘파멸의 시대’ 이후 처음일 것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국제협력체’가 군사동맹으로 치달은 불길한 그림자를 다시 보는 듯하다. 트럼프의 책사였던 스티브 배넌이 극우 국제 네트워크를 꿈꾸며 세운 ‘더무브먼트’를 감안하면 망상만은 아니다.
극우가 진화 중인 사회는 불온한 사회다. 그리고 불길한 세계의 전조다. 현상으로서의 극우는 빈곤·실업 등 사회·경제적 위기에 나타나는 정치적 반동 흐름이다. 1930년대 대공황기 파시즘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정당·미디어와 만나 조직화하면 ‘정치적 실체’가 된다. 역사가 인간에게 가까이 올 때 사회집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어리석음과 병적 징후(레비스트로스)의 하나가 극우 현상이다. 극우 현상은 글로벌 ‘전염병’이 될 수 있다.
한국 극우는 아직 반공·반중을 이슈로 한 현상에 가깝다. 하지만 전한길 같은 이가 국민의힘 ‘점령’을 외치는 상황이니 빨간불은 켜졌다. 국제 연대는 극우의 실체화를 가속할 수 있다. 한국 극우의 외세 의존을 가볍게 봐선 안 되는 이유다. 우리 역사가 과거 나치즘처럼 깨어나려 발버둥 치는 악몽(제임스 조이스)의 문턱에 서 있는 건 아닌지 두렵다.
김 청장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순직 해경 사건 관련 대통령님의 말씀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이 사건의 진실규명과 새로운 해양경찰에 도움이 되고자 사의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김 카마그라구입 청장의 사의 표명은 이재명 대통령이 이날 이 경사의 사고 경위 등에 대해 해경이 아닌 외부의 독립적인 기관에 맡겨 엄정히 조사하라고 지시한 뒤 단 몇 시간만에 이뤄졌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스스로를 ‘막차 탄 세대’라 불렀다. 학생운동이 최절정에 달하고 점차 퇴조하던 시대의 분위기를 자조하는 말이었다. 작년 12·3 계엄 포고문에서 대학이 언급되지 않은 건 그 장기적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30년이 지나도 ‘막차’는 끊기지 않았다. 비주류일지라도 학생운동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대학생 대신 다른 이름을 지닌 다양한 운동이 성장해왔다. 겨울의 광장을 가득 메운 깃발과 응원봉은 그 결과다.
그렇다면 ‘막차’라는 은유야말로 민주화 시기의 학생운동을 과도하게 신화화한 것 아닐까. ‘막차 탄 세대’는 오히려 민주화 이후 새로운 시대의 ‘첫차’를 탔던 것 아닐까. 그 누구도 자기 시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들 자신의 시대를 살고, 시대와 대결하는 것을 통해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막차는 시대에 둔감해져 그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첫차는 다른 누군가의 막차가 된다.
조국혁신당 성폭력 사건과 당의 대응을 지켜보면서, 모두가 동일한 밀도로 동시대를 통과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언론에 출연한 인사들은 2차 가해와 직장 내 괴롭힘이 일어나는 조직문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절차를 지켰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들은 해일 앞에 웅크린 채 조개만 줍고 있다.
조국혁신당을 향한 여론이 보여주듯, 한국 사회는 그런 안일한 대응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데까지 왔다. 이제는 10년이 되어가는 페미니즘 리부트, 권력형 성폭력을 향한 미투 운동,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 지켜낸 지난겨울의 광장에 이르기까지. 누군가는 그 밀도 높은 시간을 치열하고 절박하게 통과해왔다. 이번 시대의 ‘첫차’는 그들의 몫이다. 반대로 그 시대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혹은 피해자 비난과 조직 보위 논리라는 잘못된 교훈을 도출한 이들도 있다. 이제 그들에게는 ‘막차’ 타고 귀가해야 할 의무가 남았다.
첫차와 막차 사이에 기억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조국혁신당의 무책임한 대응은 지난 10년간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이다. 망각한 자는 성폭력 사건을 그저 털어낼 리스크로 볼 뿐이다. 하지만 시대로부터 배우며 공동의 기억을 새겨온 사람들은 피해자 곁에 서며 저항했다.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 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막차 전 탈출을 시도하는 조직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청년과 중년의 경계에 선 나도 책임을 느낀다. 더 이상 위를 향해 들이받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게 됐다. 안타깝게도 좋은 어른은 드물고, 특히 좋은 남자 어른은 멸종위기종이다. 대신 반면교사는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을 닮지 않으려면, 미숙하고 모자라지만 나도 이제 어른 행세를 해야 한다. 기자회견에 나선 강미정 전 대변인의 모습이 그러했다. 후배와 부하의 실수를 책임지는 건 나다. 그들이 부당한 일을 겪으면 내가 들이받아야 한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크기를 가늠하고, 내 위치를 의식하며 후배를 대하려 한다. 믿고 맡기는 동시에 지켜봐주고, 먼저 마음을 읽어주고 알아주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 되뇐다. 나는 이것을 운 좋게 만난 어른인 노혜경 시인에게서 배웠다.
지난 12·3 내란은 지지 기반이 줄어들고 고립돼가는 장기적 위기를 뒤집으려던 보수 세력의 쿠데타였다. 아직도 내란 세력이 국가 시스템 곳곳에 자리하고, 극우 세력의 준동은 위협적이다. 다만 그것이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과 명분으로 삼는 걸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런 시시하고 못난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시대로부터 배우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 그것이 용기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향한 응답 책임을 잊지 않으려는, 지난 10년 동안 성장해온 내 나름의 기억투쟁이다.
미국 극우 활동가 찰리 커크 피살 후 극우들의 ‘국제 연대’가 표면화하고 있다. 유럽 곳곳에서 추모 행사가 열리고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같은 극우 정치인은 신앙과 자유의 진정한 수호자라고 했다. 폴리티코는 지난 13일(현지시간) 이런 현상을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국제적 수렴이라고 했다. 커크는 피살 닷새 전인 5~6일 ‘빌드업 코리아 2025’에 초청돼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영국 BBC가 영국 현대사 최대 규모 극우 반이민 시위라 한 13일 런던의 ‘왕국 통합 집회’에서도 눈길을 끈 것은 극우 ‘국제 연대’였다. 집회에 가세한 영국·독일·덴마크 극우 정치인들은 여러분의 싸움이 곧 우리의 싸움이라고 했다.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에서 보았듯 한국 극우 집회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건 성조기다. 12·3 내란을 옹호하는 한국의 극우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은 특히 미국 극우와 연대를 도모하며 미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전한길)을 학수고대한다.
극우 세력이 전 세계인 일상에 이처럼 가까이 다가온 건 1930년대 ‘파멸의 시대’ 이후 처음일 것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국제협력체’가 군사동맹으로 치달은 불길한 그림자를 다시 보는 듯하다. 트럼프의 책사였던 스티브 배넌이 극우 국제 네트워크를 꿈꾸며 세운 ‘더무브먼트’를 감안하면 망상만은 아니다.
극우가 진화 중인 사회는 불온한 사회다. 그리고 불길한 세계의 전조다. 현상으로서의 극우는 빈곤·실업 등 사회·경제적 위기에 나타나는 정치적 반동 흐름이다. 1930년대 대공황기 파시즘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정당·미디어와 만나 조직화하면 ‘정치적 실체’가 된다. 역사가 인간에게 가까이 올 때 사회집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어리석음과 병적 징후(레비스트로스)의 하나가 극우 현상이다. 극우 현상은 글로벌 ‘전염병’이 될 수 있다.
한국 극우는 아직 반공·반중을 이슈로 한 현상에 가깝다. 하지만 전한길 같은 이가 국민의힘 ‘점령’을 외치는 상황이니 빨간불은 켜졌다. 국제 연대는 극우의 실체화를 가속할 수 있다. 한국 극우의 외세 의존을 가볍게 봐선 안 되는 이유다. 우리 역사가 과거 나치즘처럼 깨어나려 발버둥 치는 악몽(제임스 조이스)의 문턱에 서 있는 건 아닌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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