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5살 소년왕의 ‘요절’ 미스터리…피살·의문사로 점철된 백제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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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길중 작성일25-08-04 06:35 조회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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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조사·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웅진(공주) 백제 시절의 왕과 왕비·왕족이 묻힌 무령왕릉 및 왕릉원 가운데 2호분의 주인공을 ‘콕 찍어’ 특정한 것이다.
그 이가 보도자료 제목에 등장하는 ‘삼근왕’이다. 삼근왕은 477년 9월 피살된 아버지(문주왕·475~477)의 뒤를 이어 13살에 즉위했다가, 2년2개월 뒤(479년 11월) 요절한 소년 임금이다. ‘2호분=삼근왕’으로 특정하기 까지의 과정과 이유도 기막히다.
■치아 2점의 비밀
2023년 9월부터 왕릉원 1~4호분을 발굴한 연구소 측은 2호분 시신을 안장한 자리에 30㎝ 정도 쌓여 있던 자갈과 흙, 석회 등을 모조리 포대(베로 만든 자루) 105개에 담아 옮겨놓았다.
그 양이 1.6t(1575㎏)에 달했다. 그렇게 거둔 흙·자갈 등을 일일이 물체질로 걸러낸 결과 사람의 치아(이빨·어금니) 2점이 나왔다. 가톨릭대 해부학 교실에 분석을 의뢰했다.
그랬더니 무덤 주인공의 나이는 ‘20대 젊은 성인이거나 혹은 미성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3월11월 자문회의 결과서)는 결과가 나왔다.
그럼 가톨릭대의 자문 의견서는 ‘20대 젊은 성인 혹은 미성년’으로 에둘러 표현했는데, 보도자료에는 ‘15살에 죽은 삼근왕’이라고 특정했을까.
치아로 나이를 판정할 때 보통 도드리(아래윗니가 서로 맞물리는 치아의 요철 부분)의 마모도(닳은 정도)로 판단한다. 그런데 한 점(둘째 작은 어금니)의 경우 마모가 거의 없었다. 반면 다른 한 점(큰 어금니)의 경우 약간의 마모가 있었다. 그래서 20대 혹은 10대로 추정한 것이다.
그런데 치아 분석은 요즘 현대인의 기준으로 한 것이다. 지금보다는 거친 음식을 먹었을 1500년 전에는 현대인보다 훨씬 빨리 치아가 닳았을 것이다. 따라서 2호분 출토 치아 2점의 주인공은 20대보다는 10대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공주 왕릉원의 수상한 배치
그렇다고 ‘2호분의 주인공=삼근왕’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사적·송산리 고분군)은 한성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를 마감한 백제가 웅진(공주) 시대(475~538)에 조성한 왕릉 묘역이다.
웅진 시대의 임금이라면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 538년 사비 천도) 등 5명이다.
그 중 유일하게 주인공이 확인된 고분은 무령왕릉이다. 또 재위 도중 사비로 천도한 성왕은 ‘부여 왕릉원’(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중하총에 묻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공주 왕릉원’에 묻힌 임금은 문주-삼근-동성-무령왕 등 4명과 그 일가로 좁혀진다.
여기서 전제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공주 왕릉원의 맨 위쪽에, 맨 먼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상쩍은 유구이다. 한성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개로왕(455~475)의 가짜묘일 가능성도 있다.
개로왕은 고구려군의 한성 점령 때(475) 죽임을 당한 비운의 임금이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이 웅진 천도 후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선왕(개로왕)을 위해 가묘(假墓)를 조성했을까. 물론 ‘제사유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89년(동성왕 11) 임금이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 지냈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있다. 이곳이 선왕(개로왕)의 넋을 기리는 제사 공간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공주 왕릉원의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능원의 꼭대기(북동쪽)부터 개로왕의 가묘(혹은 제사유구)를 시작으로 1~4호분이 차례로 들어서고, 또 밑쪽(남동쪽)에 따로 무령왕릉, 5~6호, 29호분 등이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맞을 것 같다.
개로왕 가묘(제사유구)와 1~4호분은 한성 백제 시대의 전통인 돌무덤(돌방무덤)이다. 475년 웅진 천도 직후 조성된 고분 및 유구로 짐작된다. 반면 밑에 조성된 무령왕릉과 6호분은 중국 양나라(502~557)에서 유행한 전돌(벽돌) 무덤이다. 5~29호분도 ‘돌방+전돌’ 양식의 고분이다. 따라서 ‘개로왕 가묘(제사유구)·1~4호분’이 ‘무령왕릉·5~6호·29호분’보다 조성시기가 빠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주-삼근왕파, 동성-무령왕파
왕릉원이 왜 이렇게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졌을까. 백제 왕계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사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에 등장하는 백제 왕계가 들쭉날쭉하다.
“문주는 개로왕의 아들…상좌평(국무총리)으로 개로왕을 보좌…475년 고구려군의 침공 때…전사한 개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삼국사기>)
“477년 문주왕은 아우 곤지(?~477)를 내신좌평(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삼고, 왕(문주왕)의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삼국사기>)
<삼국사기>에는 ‘문주왕(22대)과 곤지’가 개로왕의 두 아들로 등장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은 완전히 다르다.
“신축년(461) 7월 개로왕이 아우 곤지를 왜(일본)와 우호를 닦기 위해 파견했고”,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며, 고구려의 한성 점령 후 즉위했다”고 썼다.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문주왕-곤지는 형제가 된다. 학계는 이 대목에서만큼은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를 더 신뢰하고 있는 편이다.
한편 삼근왕은 문주왕의 맏아들이다.(<삼국사기>) 결국 고구려의 한성 점령-웅진 천도 후 백제의 왕위는 개로왕(21대)→문주왕(개로왕의 아들·22대)→삼근왕(문주왕의 아들·23대)로 이어진다.
한데 삼근왕이 즉위 3년여 만에 요절하자(479) 백제 왕계가 바뀐다. 개로왕(21대)-문주왕(22대)-곤지 등 3형제 중 세번째인 곤지의 가계가 부각된다. 바로 동성왕(24대)-무령왕(25대)이다. 우선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삼국사기>는 “삼근왕이 서거하자 즉위한 동성왕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다.”(‘동성왕’조)라 했다. 무령왕은 어떨까.
“(백제계 사료인) <백제신찬>은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이고, 동성왕(479~501)의 배다른 형(이모형·異母兄)’으로 기록했다. 461년 곤지가 일본으로 오는 도중에 사마(무령왕)를 섬(규슈·九州)에서 낳아 본국(백제)로 돌려보냈다.”(<일본서기>)
두 자료를 종합하면 무령왕과 동성왕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두 아들이자 이복형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외톨이 동성왕릉
이제야 공주 왕릉원이 2개의 구획으로 나뉘었는지 짐작이 간다. 구릉(고분군)의 윗쪽에는 개로왕 가묘(제사유구)를 두고 문주왕(22대)-삼근왕(23대) 등 문주왕의 직계가 묻힌 것이다. 1~4호분이다.
반면 아랫쪽은 동성왕(24대)-무령왕(25대) 등 곤지(개로왕의 동생)의 직계가 안장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령왕릉-5~6호분-29호분이다. 그중 10대로 추정되는 치아 2점이 확인된 2호분이 삼근왕릉으로 특정된 것이다. 또 문주왕릉은 1~4호분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성된 1호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곤지계(동성왕-무령왕)의 무덤은 어떨까. 주인공이 분명한 무령왕릉을 빼고, 5~6호분, 29호분의 주인공을 추정하면 된다.
그 중 무령왕릉 바로 앞에 조성된 6호분을 동성왕릉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6호분이 무령왕릉에 버금가는 전돌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일본서기>는 “513년(무령왕 13) 8월26일 (무령왕의 아들인) 백제 태자 순타가 서거(薨)했다”고 전했다. 276년 뒤인 789년 <속일본기>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12월 간무 일왕의 생모인 황태후(야마토노니가사·和新笠)가 죽었다…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에서 나왔다….”
간무 일왕(781~806)이 백제계 황태후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여인의 선조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였고…. 6호분이 바로 아버지(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순타태자의 무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성왕의 무덤은 어디일까. 최근 왕릉원 구릉과 서쪽 600m 정도 떨어진 교촌리 3호분을 ‘동성왕릉’으로 지목된다. 교촌리 3호분은 왕릉원(송산리) 6호분 및 무령왕릉과 같은 터널형 구조의 전축분이다.
왜일까. 무령왕의 이복동생으로서 곤지계 왕가를 이룬 동성왕은 왜 무령왕과 떨어진 교촌봉에 무덤을 모신 것으로 파악하는 것일까.
여기서 15살의 나이에 요절한 삼근왕과, 정변으로 피살된 동성왕까지 피비린내나는 백제 역사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곤지의 수상한 죽음
시계추를 돌려 개로왕대(455~475)로 올라가보자.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동생 문주를 상좌평(국무총리)에 임명하고(<삼국사기>), 다른 동생 곤지를 일본과의 우호를 위해 사절로 파견한다.(461년·<일본서기>)
곤지가 일본으로 간 사이 한성 백제는 고구려군의 침공(475)에 파국으로 치닫는다. 개로왕이 전사하자 국내에 남아있던 동생 문주가 왕위를 이은 뒤 웅진(공주) 천도를 단행한다. 문주왕은 476년 8월 해구를 병관좌평(국방부 장관)으로 삼는다. 해구는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해(解)씨 가문 출신이다.
문주왕은 477년 4월 주목할만한 조치를 내린다. 일본에 머무르던 동생 곤지를 귀국시켜 내신좌평으로 삼고, 13살이 된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했다.(<삼국사기>) 내신좌평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 격’이었다.
문주왕은 곤지를 왕명을 수행하는 후견인으로 삼아 태자(삼근)을 보좌하도록 한 것이다. 차기 왕위를 노릴 수 있는 동생(곤지)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정치술이었으라.
그러나 곤지는 내신좌평으로 임명된지 불과 3개월만인 7월 죽고 만다. <삼국사기>는 “(문주왕 서거 두 달전인)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고 썼다. 이 ‘검은 용의 출현’ 부분이 수상하다.
“(22년 전인) 455년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난 직후 비유왕이 서거했다”는 기사가 눈에 밟힌다. 학계에서는 비유왕(427~455)의 죽음과 개로왕의 즉위 사이에 정변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477년 ‘검은 용의 출현’(5월)도 ‘곤지의 죽음’(7월)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 죽음은 비정상이었을 수도 있다. 곤지의 사후 더욱 수상쩍은 사건이 이어진다.
“477년 8월 병관좌평 해구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불법을 저질러 임금까지 무시했으나 통제할 수 없었다.”(<삼국사기>)
그런데 “문주왕은 성품이 부드러워 백성이 따르는 인자한 군주였지만 결단력이 없었다”(<삼국사기>)고 했다. 우유부단한 성격이라는 뜻이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해씨 세력에게 휘둘리던 문주왕이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동생 곤지를 불러 왕권 강화의 책임을 맡긴 것일 수 있다.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해씨 세력이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한 곤지를 제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5세 소년왕의 의문사
해씨 세력의 만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비극적인 기사가 실린다.
“477년 9월 해구가 도적을 사주하여 사냥에 나선 문주왕을 시해했다”는 것이다. 왕을 무력화 시킨 것도 모자라 아예 죽여버린 것이다.
해구는 13살짜리 태자인 삼근왕을 옥좌에 올린다. 이런 브레이크 없는 해구의 전횡에 진(眞)씨(한성백제 시대 유력 가문) 등 다른 귀족들이 반발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러자 해구는 연씨 세력(은솔 연신)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진압에 나선 세력이 바로 진(眞)씨 가문이었다.
“478년(삼근왕 2) 해구와 연신이 반란을 일으키자…왕은 덕솔 진로(?~497)에게 명하여 정예병 500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였다.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났고….”(<삼국사기>)
13살에 왕위에 오른 소년왕(삼근왕)의 업적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귀족(진씨)의 손을 빌렸지만 군사 반란을 진압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근왕은 재위 2년2개월 만인 479년 11월 서거한다.(<삼국사기>)
이 삼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석연치않은 대목이 있다. 비록 삼근왕이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원칙적으로는 해구가 옹립한 군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구의 반란을 진압한 진씨 세력에 의해 폐위·살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삼근왕이 갑자기 죽자 즉위한 이는 곤지계인 동성왕이었다.(<삼국사기>)
<일본서기>는 “삼근왕의 사후, 일본에 체류중이던 곤지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동성왕이 천왕(일본왕)이 내준 호위병 500명을 이끌고 귀국하여 즉위했다”고 전했다.
■시해된 동성왕
이 대목에서 한가지 잊고 있던 인물이 있다. 동성왕의 이복형인 무령왕(사마)이다. 무령왕은 461년 아버지(곤지)가 일본으로 가던 중 낳은 아들이다. 아버지 곤지는 갓 태어난 무령왕을 본국(백제)으로 돌려 보냈다. 그렇기에 삼근왕이 죽었을 때 만 18살이 된 무령왕 역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무령왕은 국내에 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무령왕보다 더 어리고, 일본에서 출생한 동성왕이 바다를 건너와 즉위했을까. 출신 성분 때문일 수 있다.
동성왕은 일본 현지에서 정식 혼인한 일본 왕실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일 가능성이 짙다. 반면 무령왕의 어머니는 곤지의 정식 부인이 아니다. 그래서 왕위계승권이 동성왕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동성왕은 왕권 강화와 민심 수습에 적극 나섰다. 488년(동성왕 10) 백제를 침략한 북위군을 무찔렀다.(<삼국사기>) 신라와는 혼인동맹도 맺었다. “493년(동성왕 15)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초심을 잃었다. “동성왕이 500년 궁궐 동쪽에 5자나 되는 정자(임류각)를 세웠고,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사가 보인다. 동성왕은 이때 “궁궐문을 걸어 잠궈 신하들의 간언을 막았다”고 했다. 언로를 차단했다는 뜻이다.
동성왕은 사비(부여) 천도를 염두에 두고 부여 성흥산에 성(가림성)을 쌓고(501년 8월), 그 성주로 위사좌평(경호실장) 백가를 임명했다. 그러나 백가는 이 인사발령을 좌천으로 여겼다.
<삼국사기>는 “백가는 병을 핑계로 왕명을 사양했지만 동성왕은 허락하지 않아 왕을 무척 원망했다”고 기록했다. 3개월 만인 11월 끝내 사달이 났다. 백가는 자객을 보내 사비 벌판으로 사냥에 나선 동성왕을 시해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다소 결이 다른 내용을 전한다. “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국인(國人)’들이 왕을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는 것이다. 501년 즉위한 무령왕의 나이는 만 40세였다. 동성왕의 시해 사건 배후에 무령왕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무령왕과 동성왕은 이복형제라 했다. 그래서 무령왕릉 앞의 6호분을 동성왕릉이라 추정한 견해가 있었다.
살펴보니 어떤가. 뭐가 예쁘다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이복동생(동성왕) 무덤의 뒤에 형(무령왕)의 고분을 조성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동성왕릉이 무령왕릉 구획과 떨어진 교촌 3호분에 묻혔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것이다.
■위험한 쾌도난마
지적 사항이 하나 있다. 2호분에서 출토된 치아 2점으로 ‘고분의 주인공=소년 삼근왕’으로 특정할 수 있을까. 물론 법의학자에 따르면 치아는 나이를 판정하는데, 인골보다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치아만으로는 성별 조차 판정하기 어렵다.
사실 국가유산청이 낸 보도자료의 내용은 ‘삼근왕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단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료의 제목은 ‘2호분의 주인공은 15세에 죽은 삼근왕(개로왕 손자)’였다. 제목만 보면 ‘특정’이다. 고고학 발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쾌도난마식 단정’이다. 만약 추가 발굴에서, 혹은 추가 연구에서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어쩔 것인가. 연구자가 ‘쾌도난마’한다고 해도, 신중하게 대처해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도 ‘2호분=삼근왕릉’이라 특정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렇지만 한가지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공주 왕릉원 2호분에서 출토된 치아 2점은 5세기 후반 파란만장한 백제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가운데 <삼국사기> 등 사서에도 거의 거론되지 않은 삼근왕의 존재가 새삼 부각됐다. 게다가 13세에 즉위해서 불과 3년2개월 만인 15세에 요절한 소년 삼근왕의 삶이 더욱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뿐인가.
삼근왕의 아버지(문주왕)은 물론 큰아버지(개로왕), 작은 아버지(곤지), 사촌(동성왕)까지 줄줄이 의문사 혹은 정변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웅천 천도(475)부터 사비 천도(538)까지 63년이라는 짧은 세월동안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음을….
(이 기사를 위해 오동선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이우영 가톨릭대 해부학교실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정재윤 공주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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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가자지구 휴전과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하는 ‘두 국가 해법’을 실행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28~30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공동 주최로 열린 ‘두 국가 해법’ 이행에 관한 외교장관 회의에 자이쥔 중동담당 특사가 참여했다고 31일 밝혔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자이 특사는 전체 회의에서 “가자지구 내 전투가 여전히 격렬하고 전례 없는 인도적 위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두 국가 해법’의 기반이 계속 약화되고 있다”며 국제사회가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자이 특사는 두 국가 해법을 위해 총 5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먼저 가자지구의 인도주의 위기 해결을 위해 최대한 신속하게 포괄적인 휴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이 팔레스타인인을 통치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자이 특사는 팔레스타인의 단결을 강화하고 통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국가 해법 실행을 위한 평화적 모멘텀을 유지하고 중동의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안보 비전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이 특사는 중국은 가자지구에서의 휴전과 전투 종식을 토대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포괄적이고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계속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는 자이 특사가 이번 회의에서 이라크 부총리 겸 외교장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외교장관, 유럽연합 중동평화특별대표, 쿠웨이트 외교차관, 걸프협력위원회 사무총장 등을 만나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중국 정부는 하마스와 파타를 포함해 팔레스타인 14개 정파를 베이징으로 초청해 화해와 통합을 목표로 하는 선언 자리를 마련했다. 팔레스타인 14개 정파는 중국 정부의 중재로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종식 후 모든 정파가 참여해 서안·가자지구를 통치하는 단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과 전쟁 와중에도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대립을 거듭하는 와중 끌어낸 중재 행보는 중동권에서 주목을 받았으나 가자지구 전쟁이 격화되며 성과가 묻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4일 주요 7개국(G7) 정상 가운데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공식 선언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28일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관련해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공사 감리단장이 자살 시도 후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31일 교정당국 등에 따르면 최모씨(67)는 지난 22일 복역 중이던 청주교도소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교도소 자체 구급대를 통해 병원으로 이송된 최씨는 치료받던 중 이날 오전 숨졌다.
자살 시도 당시 최씨는 같은 방을 쓰던 수용자에게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는 최씨가 손바닥 정도 크기 메모지에 남긴 1~2줄 분량의 유서도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는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한다. 그는 이전에도 자살을 시도해 교도소 측의 특별관리를 받아왔다. 다만 우울증 관련 치료와 약물 복용 여부 등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교정당국은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하는 동시에 교도소 측의 재소자 관리에 문제가 없었는지 조사 중이다.
최씨는 오송 참사 원인으로 지목된 미호강 임시제방 공사 현장을 관리·감독하는 감리단장으로 지난 3월27일 대법원에서 징역 4년 확정판결을 받았다. 시공사 현장소장도 징역 6년이 확정돼 수감 중이다.
최씨는 시공사가 기존 제방을 불법 철거하고 임시제방을 부실하게 쌓아올린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묵인 및 방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최씨는 1심 공판 과정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사죄드린다. 현장을 꼼꼼히 챙기지 못한 과실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며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사죄드리겠다”고 말했다.
집중호우가 내린 2023년 7월15일 오전 미호강 제방이 터지면서 400m 정도 떨어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에 하천수가 유입돼 시내버스 등 차량 17대가 침수됐다. 이 사고로 14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쳤다.
군항에 입항하던 해군 함정에서 31일 화재가 발생해 장병 1명이 화상을 입었다.
해군은 이날 오후 3시49분 진해 군항에 입항하던 해군 상륙함 향로봉함(2600t급) 보조 기관실에서 화재가 발생해 진압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관실에는 발전 설비와 배관 등이 있다.
바다 위에서 화재 진압을 하던 향로봉함은 이날 오후 6시 10분쯤 진해 군항에 입항했다. 현재 정박 중인 상태에서 창원 소방본부와 함께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이 사고로 장병 1명이 오른팔과 옆구리에 1~2도 화상을 입었다. 이 장병은 진해에 있는 군 병원인 해양의료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 함께 있던 다른 장병 2명은 호흡곤란을 호소했으나 현재는 회복했다.
당시 향로봉함에는 총 180여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화재 당시 함장과 도선사를 제외한 모든 장병은 함정에서 이탈했다. 화재가 함정 전체로 번지지는 않은 상태다. 해군은 “현재 가용한 모든 전력을 투입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 세계 10억명 이상의 이용자를 보유한 쇼트폼 플랫폼 ‘틱톡’이 자녀·부모 계정 간 연결을 강화하며 한층 강력해진 청소년 보호 기능을 선보인다. 각국 정부로부터 이용 금지 조치를 당하는 등 ‘유해 플랫폼’이라는 오명을 쓴 틱톡이 이미지 쇄신에 나선 것이다.
틱톡은 30일 아시아·태평양 지역 언론 대상 온라인 브리핑에서 청소년 이용자 보호를 위한 새 정책과 기능을 소개했다.
새 정책에 따라 보호자는 자녀가 틱톡에 영상, 사진 등 콘텐츠를 올리는 즉시 실시간 알림을 받게 된다. 자녀의 개인정보 보호 설정이나 관심 있는 콘텐츠의 주제, 콘텐츠 다운로드 허용 여부도 직접 확인 및 관리할 수 있다. 자녀가 틱톡 내에서 특정 콘텐츠를 신고할 경우에도 보호자에게 알림이 전송된다. 자녀와 보호자 계정의 연결(페어링)은 양측의 합의로 가능하다.
틱톡의 운영 및 신뢰·안전을 맡는 애덤 프레서 글로벌 총괄은 “청소년 계정에 대한 강력한 안전 조치를 통해 청소년 이용자의 틱톡 내 긍정적 경험을 보장하고 보호자도 안심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틱톡은 청소년 보호를 위한 자녀·부모 간 계정 페어링을 고도화하고 있다. 지난 3월 부모가 자녀의 틱톡 사용 가능 시간을 직접 설정하고 자녀의 팔로어 목록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도입했다. 2023년에는 청소년 계정의 틱톡 사용 시간을 하루 60분으로 제한했다.
크리에이터 보호 조치도 강화됐다. ‘크리에이터 케어 모드’는 이전에 신고·삭제 조치했던 악성 댓글의 작성자를 사전에 필터링하는 기능이다. 라이브 방송 중 특정 단어나 문장 등을 일괄 차단할 수 있는 ‘라이브 댓글 제한 기능’도 추가됐다.
이날 선보인 모든 보호 조치에는 첨단 인공지능(AI) 기술이 활용됐다. 인간이 하는 심사에 AI가 더해지면서 전체 유해 콘텐츠 90% 이상이 사전 제거된다고 틱톡 측은 설명했다.
틱톡은 2017년 글로벌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청소년 정신건강에 유해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22년 틱톡에서 일명 ‘기절 챌린지’(기절 전까지 숨 참기)가 유행하면서 청소년이 목숨을 잃는 사례가 잇따랐다.
또한 인스타그램·페이스북을 보유한 메타 역시 지난해부터 ‘10대 계정’은 기본 비공개로 설정된 기능을 순차 도입 중이다. 지난 4월부터는 만 16세 미만 이용자가 부모 동의 없이 라이브 방송을 켤 수 없는 기능도 인스타그램에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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